1. 옥포해전
2. 합포해전
3. 적진포해전
4. 사천포해전
5. 당포해전
6. 당항포해전1
7. 율포해전
8. 한산도대첩
9. 안골포해전
10. 장림포해전
11. 부산포해전
12. 당항포해전2
13. 명량해전
14. 노량해전

14. 노량해전 (1598. 11. 19)
  조선함대 일본함대
사령관 명나라 장수 진린,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장군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다치바나 무네시게, 데라자와 마사나리, 타카하시 무네마스
전력 명 수군의 약 400여척의 전선, 조선 수군의 80여척의 전선 500 여척의 전선
사상자 및 피해 이순신 장군이 사망. 10명의 조선 수군 군관 사망, 수군 병사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음.

 


명량해전 이후에 일본 함대는 이순신 장군의 수군 본영에서 먼 곳인 웅천으로 퇴각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수군, 전선, 군량, 무기를 모아서 수군 본영을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였다. 1598년 2월 17일에 장군은 고니시 유키나가 군으로부터 앞바다를 지키고 수군을 다시 재건하기 위해서 고금도에 통제영을 세웠다. 고금도에 통제영을 세운 이후 장군은 다음 해전을 위한 군량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이는 고금도에 평지가 많아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것이 알려지자 많은 난민들이 이 섬으로 몰려 들었다. 장군은 이들과 함께 수군을 재정비 할 수 있었다. 징비록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이 8천여명의 난민을 훈련시켰다고 하며 이에 따른 군량미 걱정을 하였다고 한다.

명 함대는 이순신 장군의 함대와 7월 16일에 연합하였다. 이후, 조선명연합함대는 크고 작은 전투를 치루었다. 8월 18일에, 토요토미가 죽은 이후 일본 조정은 조선에 있던 일본군에게 11월까지 퇴각할 것을 명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퇴각하려 하였으나, 조선명연합함대에 길목이 막혀서 실패하였다. 그러자,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에게 뇌물을 주고 그의 배를 다른 일본군 진영에 보내었다. 이순신 장군의 장수들이 이를 알고 장군에게 알렸다. 장군은 휘하 장수들과 회의를 열고 노량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하였다. 11월 18일에 장군의 함대는 노량앞바다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에 응하여 출전한 시마즈의 함대를 기다렸다. 진린의 함대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협상을 타결하지 못하여 이순신 장군의 함대와 연합하였다.

당시 바람이 북서쪽으로부터 불어오고 있었고 조선명연합함대는 이에 따른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명연합함대는 일본 함대를 함포로 공격하였다. 곧 일본 전선들은 불에 휩싸여 퇴각하였다. 퇴각하다가 일본 함대는 포구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일본군은 포구에서 벗어나고자 격렬하게 항전하였다. 전투 중반에 이순신 장군은 총상으로 인해 관음포 포구 주변에서 장군의 아들인 이회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었다. 장군은 죽기 전에 장군의 명언 중 하나인,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